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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interfacer_han 2024. 8. 5. 19:36

#1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은 언제나 하나였으나, 대답(방법론)은 늘 달랐다. 대충 생각해도 8살부터는 이런 질문을 해왔다. 지금까지 모인 대답의 갯수를 전부 합하면 수백수천 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나는 어느 때는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음에도, 그 선택지 대신 '대답'에 심취하여 생각에 잠긴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그 대답이란 나의 인생과 이 세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어야 했고, 나는 그 진실에 늘 매달렸다.
 

#2 슬로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지쳐버리고 말았다.
 
1. 어떤 대답을 오랜 고민 끝에 도출한다.
2. 이 세상의 법칙(후술할 혼돈)에 의해 대답이 산산이 부셔지고 논파된다.
3. "내가 틀린 대답을 했을 뿐이야"라며 다시 1로 돌아간다.
 
1 ~ 3을 무수히 반복하며 말이다. 결국 나는 자기혐오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점차 그 '대답'을 슬로건(Slog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슬로건, '어떤 단체의 주의, 주장 따위를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 즉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말이다.
 
지금까지 만든 수많은 슬로건들이 생각난다. 짧게는 30분, 대부분 하루에서 이틀, 길게는 한두 달까지 지속된 슬로건도 있었다. 슬로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다시 말해 어떤 하나의 슬로건이 이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일상적 경험을 겪기 전까지는, 나는 이 세상의 진리를 알아낸 것처럼 행복해했다.
 

#3 하면 된다

그런 나였기에 "하면 된다"라는 말이 정말 싫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집에 가족과 함께 놀러 가곤 했다. 집에 걸린 액자. 그 액자에 들어있는 "하면 된다"라는 붓글씨. 나는 얼어붙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뇌리에 박혀있다.
 
"하면 된다"라는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말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그냥 하면 된다"라고 대답하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질문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하며 나의 인생과 더 나아가 잠재적으로 이 세상이 취해야 할 대답을 연구하며 살고 있는데, 무사태평하게 "하면 된다"라는 대답 아닌 대답.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내가 만들어내는 대답을 슬로건이라 낮춰 부르기도 한 나였지만, 그런 슬로건들조차 "하면 된다"라는 4개의 글자보단 값져 보였다. 틀린 대답일지라도 난 시도라도 해봤다. 반면, "하면 된다"는 질문을 그냥 씹어버리는 행위로 보였다. 대답조차 아니었다는 말이다.
 

#4 조던 피터슨이 말하는 '의식'과 '의미'

조던 피터슨이 쓴 인생의 12가지 법칙이라는 책에는 질서, 혼돈, 직시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물건으로 가득한, 그러나 불이 없는 밀실에서 아주 조심히 손으로 더듬어가며 나아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어둠과 알 수 없는 물건들은 혼돈(Chaos)을 상징한다. 질서(Order)는 내 앞에 있는 물건들의 규칙이나 지금까지 알아낸 밀실의 정보 등을 상징한다. 직시는 밀실을 최대한 '불이 켜진 방'에 가깝게 생각하려는 행동이다.

주의할 점: 혼돈을 어둠으로 비유했다고, 반대로 질서를 빛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질서는 어둠 속 물건에 대한 인간의 판단(추측, 정보)이다. 빛은 신(God)의 권능으로 비유된다.


또, 의식, 의미, 균형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캄캄한 밀실 속 사람이 손으로 더듬다가 어떤 물건을 발견한다. 단 한 번의 터치로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몇 번을 더듬(=의식)고 더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이 의미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균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00%의 혼돈(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물건의 정보를 알아내려는 노력은, 혼돈의 일부분을 질서로 바꿔나간다. 혼돈이 우세하면 그 물건에 대한 갈피조차 잡을 수 없다. 반대로 질서가 우세하면 그 물건에 대해 경직된 사고만 하게 되고, 발전 가능성이 없어지고 만다. "이 물건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만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결국 혼돈과 질서의 비율은, 변증법처럼 어느 정도 적정하고 균일한 비율을 이루게 될 것이다. 즉,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물건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세상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우리 세계를 환하게 비춰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사실 밀실에 갇혀 자신도 모르는 컴컴한 길을 나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균형을 통해서만 이 앞에 놓인 어두컴컴한 길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어두운 밀실 속을 의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면서 의미를 찾는 것. 중요한 것은 세상은 컴컴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대답한들, 그것은 현재까지의 질서에 기반한 것일 뿐 어두컴컴한 암흑 앞에 무엇이 있을지를 나는 절대로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 중 하나인 혼돈이다. 물론 나의 대답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슬로건이라는 멸칭으로 나의 대답을 자조적으로 격하시키기는 했으나, 대답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직시이기도 했다.
 
나의 문제는 이 세상에 마치 혼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혹은 좋은 대답을 도출하면 어떤 혼돈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측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혼돈이 어떻게 혼돈일 수 있겠는가? 혼돈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나의 대답엔 필연적인 취약점이 존재했다.
 
또, 나의 대답 또한 "하면 된다"라는 말과 다를 것 없이 질문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질문이 뭐였나. "어떻게 살 것인가?"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질서라는 상자에 쑤셔 넣고 혼돈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싹싹 빌었다. 이 또한 대답 아닌 대답이었다. 혼돈이 일어나 나의 대답이 깨지고 나면, 난 나의 대답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의 질서를 담을 상자의 모양을 다듬었다. 당연히 그 상자은 다시 다듬어질 운명이었고 나는 그런 반복을 하며 살아왔다.
 

#5 되면 한다?

내가 만들어온 질서의 상자. 무한한 세상을 내 자그마한 질서에 넣어버리겠다는 오만의 산물. 이 태도는 "되면 한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 "되면 한다"는 어떤 질서를 세우고, 그게 잘 세워지면 그제야 질서에 맞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반면, "하면 된다"는 혼돈이다. 앞뒤 재지 않고 일단 행동한다. 사실 "하면 된다"라는 대답은, 질문이 뭐였든 간에 상관없이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질문이든 그냥 씹어버리고 행동하는 것. 아무런 질서가 없는 자유(불확실성) 그 자체.
 

#6 진정한 대답: '균형'

나는 다시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먼저, "되면 한다"로 대변되는 나의 기존 태도를 버려야 한다. 혼돈은 절대로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라는 대답 역시 잘못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하면 된다"라는 말에서 느껴왔던 불쾌감.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아무런 질서가 주어지지 않은 혼돈에서 오는 불확실성과 스트레스가 그것이다. "하면 된다" 또한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질서는 절대로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반드시 어떤 질서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하면 된다"는 그 필연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으로, 나는 그게 싫었던 거다.
 
둘 다 답이 아니다. 하지만, 둘은 동시에 답의 일부다. 피터슨은 캄캄한 어둠과도 같은 이 세상이 환하게 빛나는 순간은, 혼돈질서균형을 이루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것의 시작은 혼돈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 갓난아기가 자각하는 이 세계의 순간은 100%의 혼돈이다. 이럴 때는 "하면 된다"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다치고 깨지며 필연적으로 세워지는 질서를 확립해 나간다. 그리고 그 질서가 얼마간 쌓이면 자연스레 그 아기는 "되면 한다"의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오래 갈 리가 없다. 혼돈은 절대로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체념해서는 안 된다. 다시 다치고 깨지며 질서를 세운다. 이 균형이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이다.
 

#7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형벌

균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해답이면서 동시에 족쇄이기도 하다. 혼돈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혼돈을 낳는다. 달이 차면 기울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균형을 맞추려고 온 의식을 집중하는 우리는 어찌 보면 시시포스와 같은 처지다. 시시포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 올려놓으면 계속 굴러떨어지는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까지 끊임없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존재다. 진정한 대답이 이제 무엇인지 안다고 한들, 시시포스와 같은 현실에서 대답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형벌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현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그러한 현실에서 시시포스이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로 반항을 제시한다. 신이 내린 형벌 자체를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돌을 올리는 그 행위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 그리고 그 의미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신이 내린 형벌적 현실과 대립(반항)한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의미는 피터슨이 제시한 의미와 맞닿는 부분이 존재한다. 전자의 의미는 '살아갈 이유'이며, 후자의 의미는 '진정한 대답에서 얻어지는 결실'이다. 살아갈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 이유의 충족이라는 결실 또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살아가는가?"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살아갈 이유'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손에 꽉 쥐고, 어두컴컴한 방에 한 발 한 발을 내디딘다. 그렇게 걸음에 가속도(질서)가 붙다가도, 어느 순간엔 벽(혼돈)에 부딪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균형을 잡고 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어두컴컴한 방을 빛없이도 환하게 비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