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는 살아오는 내내 갈등이 두려웠다. 일상에서는 언쟁을 피하고 무시하며 그것으로부터 숨으려고 노력했다. 대답을 회피하고 농담으로 에두르는 기술이 늘어갔다. 이 열성적인 갈등 회피 덕에 친구들은 나를 좋아했다. 친구들이 사소한 다툼에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나는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편안함을 즐겼다.
갈등 회피는 21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없이 자명한 지혜처럼 보인다. 우리의 공공생활의 특징 중 하나가 합리적 논쟁의 부재라면, 또 다른 특징은 정치적 반대 집단들 간에 점점 커져가는 증오와 적대감이다. 이런 분노의 정치와 문화 전쟁의 시대에 갈등은 오히려 삶의 신중한 선택일 뿐 아니라 (현대인의) 미덕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는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토론대회에서는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갔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변함없이 온순하게 지냈다.
갈등을 피하면 편안해진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터지는 시한폭탄을 품 속에 안게 되는 편안함일테지만 말이다.
#2 핵심 논리
#2-1 반대: 토론 상대에 대한 예의
브루스 코치는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토론을 포기하고 있어. 상대방에게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자꾸 그냥 넘어가는데, 대체 왜 반박을 안 하는 거지? 너희들은 지금 쟤네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가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다고. 이렇게 해보자. 상대가 새로운 논점을 제시할 때마다 무조건 헛소리라고 생각해. 그런 다음 어떻게든 그 이유를 생각해내. 마음 속으로가 아니라 우리끼리 연습할 때는 그냥 "헛소리!!!"라고 크게 외쳐버려."
브루스 코치는 이어 말했다. "상대를 이기려고 그러라는 게 아니야. 지금 너희는 상대편 논증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턱대고 동의하고 있어. 상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이 상대방에게 판단을 미루고 있다고."
나는 토론 때 썼던 메모지를 슬쩍 내려다봤다. 상대편 논증을 적는 공간이 많이 비어있었다. 단어와 짧은 문구 몇 개가 드문드문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동의하는 건 이상적인 전략이 아님을 이해했다. 더불어 그게 일종의 자기기만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실제로는 상대의 논증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남에도 그저 주장이 강할 뿐이라 여기며 넘어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너희는 상대의 논점들 중 어떤 것에도 진짜로 동의하지 않아. 그렇지 않니? 너희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야. 그건 비겁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음, 그것 참 흥미로운 생각이군요' 하면서 진짜 생각을 감추는 거나 다를 바 없다고. 대놓고 반박하는 건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게 아냐. 그건 토론자로서의 기본 의무야. 너흰 상대방의 논증에 제대로 대응해줘야 해. 그래야 상대방도 개선할 기회가 생기지. 청중에게도 이야기의 다른 측면을 볼 권리가 있고."
브루스 코치의 주장은 굉장히 참신해보인다. 하지만 근거까지 듣고 나면, 토론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며 진부한 태도라는 걸 깨닫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갈등 회피 성향을 띈다. 그게 토론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코치가 제시한 '헛소리라고 생각하기' 습관은 무턱대고 동의하는 토론자에 가한 처방일 뿐, 옳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해당 습관을 무의식에까지 들여놓게 된다면, #2-6에 있는 'POI'로 이어질지도 모르니.
#2-2 '반대'에 흐르는 낙관주의
브루스가 말을 이어갈수록 나는 그의 충고에 낙관주의가 흐르고 있음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반론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토론 상대에 대한 신뢰의 표시였다. 상대가 우리의 허심탄회한 의견을 들을 자격이 있고 그걸 품위 있게 받아들이리라는 판단이 담긴 행위였다. 헛소리!!!라고 외치는 건 반대에서도 긍정적인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믿는 행위였다.
이와 반대로, 나의 갈등 회피 성향은 훨씬 더 어두운 가정들을 전제로 삼았다. 의견 충돌이 분열적이고 완전히 파괴적이진 않더라도 별 효용이 없으리나는 가정 말이다. 그건 인간을 훨씬 더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데서만 나올 수 있는 관점이었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공정하게 행동하리라고 믿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제서야 올바른 질문에 맞닥뜨렸다고 느꼈다. 반론이 과연 반대의 파괴적인 힘을 넘어선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이 책에서 반복되는 핵심 주장은, 토론은 '더 좋은 결론'을 위한 삶의 태도라는 것이다.
#2-3 모든 논증에는 틈이 존재한다
대회에서든 일상에서든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나은 논증에 압도되거나 설득당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어쩌면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그런 논쟁을 주고받으며 단순히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풍성한 배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뉴스에서 정치가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는 영상을 시청하곤 했다. 그들 중 말을 더 잘하는 사람은 마치 우리가 넘볼 수조차 없는 지혜를 가진 듯 천하무적으로 보였고 나머지는 그냥 지루하고 뻔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 옆에서 속기사 일을 수행하는 사람과의 인터뷰했을 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논증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낫다. 그리고 어떤 논증에도 허점은 있다."
왜냐하면, 토론이란 고정된 진실(옳고 그름)이 아니라 공유된 진실을 넓혀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영원한 베일에 쌓여있어 각기 다른 해석, 다른 관점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어느 해석이든 틈(사각지대)은 반드시 존재한다.
#2-4 반론: 논증의 반대
반론, 즉 상대의 논증을 무너뜨리는 기술은 이론상으론 무척 단순하다. 논증에는 두 가지 입증책임이 따른다. 바로 핵심 주장이 사실이며, 그것이 결론을 뒷받침한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다.
논증의 2가지 입증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어떤 논증도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해 그 논증이 사실이 아니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혹은 둘 다라고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논증을 '기각'시킬 수 있다. 이것이 모든 반론의 기초다.
참고: 논증의 2가지 입증 책임 ('사실'과 중요성')
#2-5 반론의 종류
예를 들어
결론: 우리는 새 차를 사야 한다.
핵심 주장: 왜냐하면 지금 차는 구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차는 실제로 구식이다.
중요성: 최신 차를 타는 것은 중요하다.
라는 논증에 대해서 반론해보면
1. 사실 반론
1-1. 사실이 아님을 보임
"아니다. 요즘 사람들도 해치백 스타일을 꾸준히 찾는다."
1-2. 증거가 부족함을 보임
"당신은 사람들의 자동차 취향이 변했다고 믿을 만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1-3. 상충하는 정보(반례) 제시
핵심 주장이 결론을 뒷받침하지 못하도록 만듦. "잡지 '카 데일리'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자동차 애호가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2. 중요성 반론
2-1. 제시된 '중요성'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임
즉 상대가 논리적 비약을 했거나 관련성을 잘못 판단했을 수 있다고 말함. "우리가 왜 꼭 최신식 차를 몰아야 하죠?"
2-2. 제시된 '중요성'에 기반한, 더 나은 대안을 제시
"그렇다. 우리는 최신식 자동차를 몰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차를 튜닝해서도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2-3. 제시된 '중요성'의 상대적 가치를 저하시킴
제시된 '중요성'이 타당하나, 우선순위상 다른 '중요성'들에 밀리기에 결론을 기각해야 한다고 말함. "그렇다. 우리는 최신식 자동차를 몰아야 한다. 하지만 형편을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에 있는, 제시된 '중요성'의 상대적 가치를 저하시키는 반론이 가장 낯설다. 왜냐하면 일상에서의 우리는 어떤 주장을 이루는 '중요성'이 타당하다는 판단이 들면, 무심코 그에 동조해버리기 때문이다. 허나 명심할 것은, '중요성'은 다다익선이 아닌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2-6 비(非)건설적 반론 - 끼어들기 (POI)
세계학생토론대회의 도드라지는 형식적 특징은 토론에서 이의 제기(혹은 잘못된 정보를 지적하기(Point Of Information, 이하 POI))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POI는 토론자로 하여금 더 책임감 있게 말하도록 한다는데서부터,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더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토론자들을 훈련시킨다는 이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정당화됐다.
하지만 나는 이런 끼어들기의 주된 기능은 토론에 일종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한 POI는 토론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끼어든 사람이 우월하거나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반면 날카로운 지적에 제대로 응수하는 토론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관중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건 청중을 위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끼어들어 반론을 펼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끼어들기는 언제나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으니까. 일상 대화에서는, 논쟁이 어떻게 시작됐든 그 끝이 예측 불허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꼭꼭 숨겨뒀다가 나중에 짠 하고 들이미는 사람도 있고, 본질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엉뚱한 이야기를 던지는 사람(다람쥐)도 있었다.
게다가 끼어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논증이 아니라 결과를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결론에는 적어도 한 가지는 수긍할 만한 대목이 있었지만, 상대가 그걸 제대로 파악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끼어들기는 상대에게 방향을 전환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상대는 결론을 입증하는 새로운 논증을 하거나("그럼 진화 이야기는 잠깐 접어둡시다. 우리가 타인을 돕는 건 나중에 그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애초에 목표 주장을 바꿀 수도 있었다 ("적어도 어떤 행동이 이타주의에 의한 건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끼어들기는 상대로 하여금 상대방이 자기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게 했다. 끼어들기를 당한 사람은 나머지 대화를 묵살하거나 그걸 항변의 구실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제대로 말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방어적이죠?"). 또, 끼어들기를 너무 많이 하면 상대가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아예 차단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왜 끼어드는가? 한 가지 대답은 상대에게 얼마간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지배 본능의 저변에는 어떤 나약함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절감했는지 모른다. 솔직히 나는 가브리엘(저자의 토론 상대로, 가브리엘이 말하는 중간에 저자가 끼어들기를 범해버림)의 말이 내게 미칠 효력이 두려웠다. 그가 나를 설득하거나 할말이 없게 만들까봐 불안했다. 그런 방어적인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끼어들기는 일종의 거래라는 게 보였다. 적어도 지지는 않으려고 이길 기회를 포기하는.
끼어들기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닐테다. 예를 들어, 상대가 누가 봐도 명백히 거짓인 증거를 토대로 논증을 구사하는 경우가 있겠다.
#2-7 "더 강해져서 돌아와라"
토론을 시작하며 가장 좋았던 게 바로 끼어들기를 당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자유 덕분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끼어들기 금지 규칙은 다른 중요한 효과도 있었다. 상대의 말에 즉각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대신 차선책으로, 상대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최고의 반론을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토론에서 '흐름을 따르는' 법을 배웠다. 흐름을 따른다는 건 상대방이 하는 모든 말을 잘 요약해 적는다는 뜻이었다. 사이먼 코치는, 상대의 논증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말고 강화해서 대응 전략을 짜라고 가르쳤다. 만약 상대가 적절한 예나 중대한 논거를 빠뜨렸다면 "아마 저 팀의 토론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라고 덧붙이며 알려주라고 했다.
우리 귀엔 자책골을 넣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이 들렸다. 하지만 사이먼은 가장 강력한 반대 주장에 대응할 때야말로 청중을, 그리고 어쩌면 상대까지도 설득할 가능성이 극대화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전략은 토론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상대편을 더 진지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말 잘하는 토론자는 상대방의 실수에 고소해하지만 진짜 훌륭한 토론자는 자기가 먼저 나서서 실수를 바로잡아주었다. 반면, POI는 경청에 바탕을 둔 토론 정신을 훼손했다. 이는 한때 길고 사려 깊은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던 것을 '헛소리라고 생각하기'라는 자동반사적 반응으로 바꿔놓았다. 그런 움직임 즉, 개입과 책임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진정한 설득이라는 중대한 가치를 조금 양보함으로써 얻어졌다.
적을 더 강하게 키우는 토론자가 되자. 상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2-8 비(非)건설적 반론 - 잘못된 쾌락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분노에는 일말의 쾌락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이는 누군가(또는 누군가의 관심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시작된다. 이런 깨달음은 고통을 주지만 잘못한 자에 대한 '확실한 복수'의 욕망도 함께 불러일으킨다.
나는 토론이 이런 쾌락에 얼마나 순식간에 잠식당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온당한 의도를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내 목표가 상대를 상처입히고 모욕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분노는 그 자체로 동기였다. 신기하게도 분노에 찬 나의 스피치는 갈등을 혐오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실수를 조롱하거나 상대의 성격을 공격하면, 진짜 논쟁거리와 씨름해야 하는 훨씬 더 어려운 임무를 차치해둘 수 있다는 점. 그리하여 양쪽이 본래 논점으로 돌아가려면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분노의 반대는 평온함이었다. 분노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를 평온하게 만드는 것들을 활용해야 했다. 이를테면 웃음이라든지 번영과 성공의 기분이라든지 만족감 같은 것들을. 이 철학자는 그 목록에 '타당한 희망'도 포함시켰는데, 반대 주장은 내게 그런 희망의 구현처럼 보였다.
나는 형식을 갖춘 토론을 해본 적이 없다. 나중에 그런 기회가 생기면, 저자의 경험처럼 특유의 분노가 이글거릴지도 모르겠다. 그 감정을 묻어두지 않고 제대로 마주해야겠다.
#2-9 'No'만 외쳐선 이길 수 없다
브루스 코치는 우리의 열의만큼은 정말 좋았지만 상대팀의 말을 논박하겠다는 의욕만 너무 앞선 나머지 중요한 핵심을 놓쳤다고 했다. 상대의 오류를 입증하는 것과 자신의 말을 증명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거였다.
"이 토론에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상대팀이 형편없는 주장을 한다거나 나쁜 녀석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니야. 언론의 자유에 대해 포괄적인 제약을 허용하도록 청중을 설득하는 거지. 나는 너희들이 그걸 잘한 것 같진 않아. 노를 제아무리 많이 한들 예스가 되진 않아."
브루스는 최고의 토론자는 자신의 반론을 반드시 긍정적인 주장으로 마무리짓는다고 설명했다. 최고의 토론자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을 공격한 다음 방향을 틀어 자신이 지지하는 것을 옹호하고, 그럼으로써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질문에 응답한다.
그는 반론의 마지막 단계는 반대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단 상대의 주장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 다음엔 더 나은 대답을 제시해야 해."
나는 반대 주장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았다. 그런 전환(상대편의 주장에 반대하다가 나의 제안을 주장하는 일)은 토론에는 도움이 되지만 일상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반대는 사실, 가치, 처방토론에서 더 나은 해답을 내놓기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 하지만 그 답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복잡한 일을 하려면 점잖은 비평가의 자세를 벗어나 실수와 반대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입장을 밝혀야만 한다.
이처럼 비판에서 긍정적 주장으로의 전환은 반론의 긴장감을 감소시키는 면이 있었다. 그 결과 우리 팀은 더 큰 표적이 되었다. 나는 대화를 진전시켰다는 만족감을 얻었다.
정치에 '충성스러운 반대'가 있다면 토론에는 반대 주장이 있다. 두 영역 모두 갈등과 의견 불일치를 통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분노가 주로 (상대의 또는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는 반면, 반대는 결코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경쟁 형태를 추구한다.
당연히, 반론은 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평가의 자세에서 벗어나야'하는 이유는 청중과 심판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비평가'인 그들은, No만 외치는 토론자를 승자라고 비평치 않을 것이다.
#3 나의 생각
#3-1 솔직히, 여전히 갈등은 피하고 싶다
저자가 주장한 '갈등에 흐르는 낙관주의'를 고려해도, 갈등은 여전히 피하고 싶다. 내가 토론에 나가서 어떤 주장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승패가 걸려있기에 '어쩔 수 없이'하는 행동일 것이다. 갈등이라는 선택지가 그렇다. 이 '갈등'이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선을 돌리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해왔던 관념이기에, 이렇게 수면 위로 끌어내어 묘사하는 것조차 불편하다.
앞으로도 역시 난 여전히 갈등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다만, 내게 정면으로 다가오는 갈등을 굳이 피하지는 않겠다. 이 정도의 태도는 견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만큼은 피하지 않기'. 이 정도의 타협이라면, #1에서 말한 '현대인의 미덕'도 여전히 지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
#3-2 '중요성'의 제로섬 게임
참고: 논증의 2가지 입증 책임 ('사실'과 '중요성')
자신의 입장에서만 중요한 것을, 상대방에게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한술 더 떠 그런 주장에 반대하기는 커녕 무심코 받아들여버리곤 한다. 현대인의 갈등 회피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2-5에서 보듯 '중요성'이 타당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너 입장이긴해도, 너가 중요하다는데 그렇겠지"라는 태도다. 그리고 생각을 멈춰버린다. 제일 치열한 싸움이 남았는데 말이다.
'중요성의 옳고 그름'은 1차적인 논쟁거리에 불과하다. 진짜 싸움은 그 이후에 오는 '중요성'들의 제로섬 게임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 "국립 공원에서 비둘기 모이를 줘도 된다"라고 주장하는 상대가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상대의 논증을 이루는 '중요성'이, (약간 허술하긴해도)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해보자.
우리는 그 '중요성'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건 "국립 공원의 경관을 (비둘기의 배설물로부터) 깨끗이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와 양립할 수 없는 '중요성'이다.
상대 또한 내가 제시한 "국립 공원의 경관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라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보자. 이제 그 순간부터 '중요성'은 제 2라운드, 제로섬 게임으로 바뀐다. 둘 중 무엇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가? 그런 점에서, 제 2라운드는 옳은 것(상호가 타당하다고 동의한 어떤 '중요성')의 옳지 않음(그 '중요성'의 낮은 상대적 가치)을 역설하는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4 요약
반론은 상대가 쌓은 벽돌(논증)의 설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더 좋은 설계가 무엇인지도 넌지시 알려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