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이터 - 관계

#1 개요

주방세제 피니시의 제조사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설거지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열 명 중 여섯이 설거지가 스트레스라고 대답했고, 그중 4분의 3이 그릇을 미리 한 번 헹구어 식기세척기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발견은 가사 분담 논쟁이었다. 모든 가정이 설거지와 관련된 논쟁을 한해 평균 217차례, 한 달에 18차례나 벌였다. 대부분은 누가 세척기를 비워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고 개수대에 담가둔 그릇 때문에도 싸웠다.

가까운 이들 간의 토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핵심 논리

#2-1 설거지 논쟁의 비극

설거지에 대한 설문조사의 결과(#1)는 사람들이 논쟁에 대해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뚜렷이 드러냈다.

1. 지속적인 의견 충돌은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2. 대부분은 사소한 문제로 싸운다.

두 사실 모두 이상했다. 협상 이론에 대한 책이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을 찾으라" 말한다. 또, 협상에서의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의견 충돌을 작은 부분으로 쪼개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반대는 그런 이론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듯 보인다. 친구, 가족, 연인 같은 사적인 관계서는 굳이 공통점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공통점이 없다면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사소한 집안일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더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서 얻을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가까운 이들끼리 언쟁을 벌일 땐 맘 편히 아무렇게나 행동한다. 그래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대체로 정신 건강에 좋았다. 하지만 실수, 오해, 홀대도 낳았다. 또, 상대방이 수긍하지 않으면 사려 깊지 않게 행동하거나 곧장 화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소리 지르며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친밀한 관계와 사소한 문제가 오히려 논쟁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이다. 설거지 논쟁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우리가 상대를 덜 사랑하거나, 더 중요한 문제를 두고 다투고 있다면, 논쟁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친함'이라는 이름의 좋기만 할 것 같은 개념에도, 동면의 양면 같은 부작용이 있다.
 

#2-2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논쟁

사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라는 곤란함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내가 만든 네 가지 체크리스트(RISA)를 활용해 보는 것이다. '좋은 반대'를 위한 조건은 대체로 확보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관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침묵이 답인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언제나 침묵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여러 토론의 기술이, 가까운 이들 간의 논쟁에서 나를 구원해 주지는 않으리라는 건 분명했다. 문제는 내가 최선을 다해 열성적으로 논쟁해도 상대를 설득하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설거지 논쟁의 비극은 '나쁜 반대'를 낳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은 때로 진실을 추구하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충동을 압도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우면서도 함께 지내기라는 목표를 잊게 했다. 게다가 이 '나쁜 반대'는 상대방과 나를 오가며 거의 예외 없이 증폭되었다.

침묵을 하거나 본격적인 토론 기술을 사용해도 친한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상대방을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2-3 입장 전환 (Side Switch)

(저자가 미국에 살던 시절 다니던 교회에서는 동성혼에 대한 찬반 토론이 열렸다. 저자는 그때의 경험을 공유한다.) ... 토론은 반대에 반대가 겹겹이 쌓이기만 하면서 결국 감당하기 힘든 상태로 치달았다.

토론 내내 침묵을 지켰던 목사님은 기도와 부탁의 말로 회의를 마쳤다. "오늘 오후에 여러 발언들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동료 신도들이 한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다른 관점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목사님 말을 들으니 경쟁적 토론의 기술 하나가 떠올랐다.

입장 전환 (Side Switch)
토론의 상당 부분은 확신에 대한 훈련이다. 논제를 받아 드는 순간 토론자는 그 관점을 완전히 확신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의도적으로) 장착한다. 토론자는 이 절대적 감정에 준해 주장하고, 반대하고, 격정을 표출한다. 하지만 준비를 다 끝내고 나면 토론을 시작하기 전 잠시 불확실성을 가정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 다음은 3가지 입장 전환 기법으로, 토론이 시작되기 5분 전에 3가지 중 하나를 수행하곤 했다.

입장 전환의 3가지 기법
1. 브레인스토밍
종이 한 장을 꺼내라. 당신이 반대 측이라고 상상하고, 그 입장을 지지하는 훌륭한 주장 4가지를 떠올려보라.

2. 스트레스 테스트
반대 측의 관점에서 당신의 주장들을 검토하라. 각 주장에 대해 가능한 가장 강력한 반대 주장들을 적어보라.

3. 상대 입장에서 잠재적 패배 요인 분석
반대 측 입장이 되어 토론에서 이겼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이 어떻게 이겼는지 그 이유를 써라. 그 이유는 상대의 실수가 될 수도 있다.

그다음 단계는 제각각이다. 예상되는 반대에 대답하기 위해 주장을 수정할 수도 있고 반대 주장들에 대한 반박을 미리 준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 개념은 동일하다. 자기 의견에 대한 확신을 잠시 제쳐두고 다른 시각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일. 그렇게 다른 신념의 합리성을 체험해 보는 것. 이는 모두 토론에서 이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입장 전환하기는 가까운 이를 이해하는 공감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실제 토론장에서도 쓰이는 경쟁의 기술이기도 하다.
 

#2-4 분리하지 말 것: 상대와 나

협상 전문가들은 그들만의 입장 전환 방법을 제시한다.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Getting to Yes)』의 공저자 윌리엄 유리는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규칙을 찾아냈다. "상대방이 만족하도록 그가 한 말을 되풀이한 뒤에야 자기가 할 말을 할 수 있다"라는 규칙이다. 갈등 이론 전문가 아나톨 라포포트는 사람들에게, 반대 주장을 공격하기 전에 그 주장이 '유효한 영역', 즉 그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르는 조건을 분명히 짚으라고 조언했다. "검정은 희다"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네거티브 필름을 볼 때는 그렇지요"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전술의 문제는 우리와 상대방을 계속해서 엄격히 분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장 관대한 순간에도, 이를테면 검정이 흴지도 모르는 이유를 찾아내느라 애쓰는 순간에도 우리는 (너그러운) 비평가로서 상대방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입장 전환하기는 달랐다.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반대 관점을 취해보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다른 신념과 주관적 합리성을 직접 체험해 보게 했다. 우리는 잠시 자신과 상반되는 생각을 믿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직접 느꼈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이(우리처럼!) 입장 전환을 해보지 않는다면 생경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결론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그 자취를 추적했다. 풀어쓰자면, 우리의 처음 입장을 A 상대방의 입장을 B라 하자. 입장 전환하기를 하면 우리의 입장은 B가 된다. 이 상태(B)에서 A의 입장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확인했다는 얘기다.

입장을 전환해보면 우리 자신도 다른 각도에서 보였다. 우리는 스스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는 가능성, 우리의 믿음이 특정한 선택과 가정들로부터 나온 결과일 가능성, 어쩌면 우리가 바로 관용이나 수용이나 저지의 대상일 가능성, 우리에 대한 반대가 당연한 것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상대가 되어본다. 그러면 둘은 하나가 된다.
 

#2-5 종이와 펜으로 하는 공감

입장 전환의 이런 측면들은 모두 공감에 대한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공감을 즉각적인 심리적 연결 또는 미덕의 표현이라 보지만, 토론자들은 이를 일련의 행위를 통해 도달하는 이해라고 여겼다.
 
공감에 대한 이런 관점이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다. 선의나 상상력이 아니라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된다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장점도 있었다. 상상력, 미덕, 감정, 직관 같은 우리의 자질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도 우리에겐 할 일이 있다는 점이었다. 입장 전환은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도 무언가를 하도록 요구했다.

물론 우리는 상대방을 오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입장 전환의 핵심은 상대방의 생각을 예단하거나 그들의 말에 귀를 닫을 구실을 찾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기만의 생각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흔들어, 다른 관점에 더 열린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오랫동안 비신자들을 괴롭혀온, '도무지 신이 안 믿어지면 어떡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시작한 길을 따라가라. 마치 신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고, 성수를 마시고, 미사에 참여하라." 말하자면 믿음은 종교 행위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라는 말이었다. 입장 전환하기는 공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즉 의례적 행동에서 나온다고 약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정해진 절차를 따르고, 나머지는 그 자연스러운 결과에 맡기면 된다.

세상을 자신의 눈과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동시에 보는 경험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힘이 든다. 하지만 이는 사랑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감정적 공감은 매우 빠르며 에너지 넘친다. 그러나, 의식적 통제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성적 공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하기 쉽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종이와 펜은 이럴 때 꺼낸다.
 

#2-6 분리할 것: 신념과 정체성

입장 전환하기를 통해 나는 더 진득하고 신중해졌고, 논쟁하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거듭될수록 이런 합리성의 저수지도 메마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칙칙하고 익숙한 나쁜 주장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문제는 입장 전환은 짧고, 의견 충돌은 길다는 점이었다. 이 기술은 모든 걸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가정을 뒤흔들어 나쁜 논쟁의 고리를 끊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떨어뜨려 놓을 때조차 자부심, 두려움, 정체성 같은 요소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 지점에서 토론이 내게 가르쳐주는 바가 있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입장 전환하기는, 우리와 상반되는 입장을 고려하고 그 입장이 되어보기도 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의 한 예일 뿐이었다. 이미 토론대회에서는 이 원칙이 반복될 뿐 아니라 그 구조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토론대회에서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개인적 견해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입장을 정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동전 던지기, 가위바위보, 제비뽑기 등이 활용되었다. 어쨌든 늘 무작위였다. 옥스퍼드 유니언의 영상물에는 "이 영상의 발언자는 토론대회 참가자이므로 그 관점이 반드시 그가 실제 믿는 바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라는 면책 고지가 달린다. 토론은 '무엇'과 '누구'를 분리하는 일이니까.

어떤 토론대회는 실제로 각 주제에 대해 양쪽 입장 모두에서 토론하기를 요구했다. 양 팀 모두 같은 주제에 대해 한 주는 찬성, 그다음 주는 반대해야 했다.

입장 전환을 통해 상대와 내가 '통합'된다는 말은 정체성이 무의미해진다는 말이 된다.
 

#2-7 분리에 대한 비판

토론의 이 같은 측면은 심각한 비판을 불러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나는 양측이 임의로 입장을 부여받아 토론 경쟁을 벌이는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라고 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옳든 그르든 괘념치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주장을 멋들어지게 할 줄 아는 젊은이가 아닌, 옳은 편에 대한 열정적 신념을 가진 젊은이를 대학이 배출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전직 토론 코치 리처드 머피 교수는 공적 발언은 진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토론자는 자신이 진짜 믿는 바를 찾고 그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는 토론 코치 브룩스 큄비의 말을 빌려 루스벨트 같은 견해를 드러냈다. "민주주의 사회에는 동전 뒤집듯 양쪽 주장을 취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라 (...) 원칙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게다가 모든 토론자에게는 자신이 진짜로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는 때가 온다. 주로 한 라운드가 끝나고 다음 라운드가 시작되기 전의 고요한 순간이다. 어떤 입장이든 그에 대한 주장을 찾도록 훈련받은 총명한 젊은이에겐 그런 자기 성찰이 혼란을 부추긴다.

또, 공론장에서 오로지 이기는 데만 관심을 갖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도 눈에 보였다. 언변 좋은 정치인들은 그 기술로 현실을 왜곡했다. 비양심적인 광고대행사들은 담배 회사의 메시지를 교묘하게 만들어 퍼뜨렸다. 정치와 시장에서 진실성이 부족한 모습이 추하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견딜 수 없는 일일 터였다.

'분리'의 가장 큰 부작용은 불한당이 생기기 좋다는 점일 테다.
 

#2-8 분리에 대한 옹호

대부분의 토론자는 좀처럼 이런 비판에서 비롯되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 역시 토론 경력을 이어오는 내내 수시로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계속해서 토론에 매달렸던 걸까?

답은 토론장에 있었다. 토론 대회의 토론자와 관객은 모두 이 활동의 극적인 특성을 이해했다. 주장과 발언자의 정체성을 연결해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극장에서 공연을 볼 때처럼 기꺼이 불신을 유예한 것과 같다. 신념과 정체성, 즉 사상과 그것을 말한 사람을 분리하는 일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법정 같은 곳에서는 특히 옹호되기 힘들다. 하지만 토론장에서는 세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1. 이 분리는 발언자에게 실험해 볼 여지를 준다.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개진하고, 생각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마음껏 시도해 볼 수 있다. 진정성과 일관성이라는 관습적 가치는 융통성과 창의성 같은 미덕에 자리를 내주었다.

2. 토론대회는 청중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아이디어를 접할 기회를 준다. 토론대회는 누가 뭘 말하는지를 뒤바꿈으로써, 토론자의 정체성과 주장이 동일할 것이라는 본래의 규칙을 깬다. 우리가 실제로 믿는 바에 반대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들을 재고해 볼 계기를 마련한다.

3. 분리는 상대방에게 더 잘 반대할 방법을 제시해 준다. 우리 토론자들은 경쟁 상대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주장이 그들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니 토론장에서 우리는 마치 재미난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과거의 일관성이나 미래의 평판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이디어를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토론장을 떠날 때쯤에는 많은 이들이 이 문제가 복잡하다거나, 반대쪽 주장에도 그럴듯한 면이 있다거나, 양쪽 다 일리가 있다는 느낌을 품게 되었다.

토론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분리'에 대한 문화가 깃든.
 

#2-9 결론: 신념은 출력물이다

결국 토론이 신념을 약화시킨다는 뜻일까? 아니다. 토론은 신념이란 말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통상적으로 보면 신념은 토론의 바탕이 되는 것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활발한 토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즉, 신념은 입력물이 아니라 출력물이었다. 따라서 목표는 우리의 믿음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전념할 만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때까지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는 일이다. 우리는 토론을 하기 위해 답을 미리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신념의 강도를 그 내용의 극단성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극단적인 주장' = '강한 믿음'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런 착각은, 다른 반론의 여지가 없이 자기 믿음에 완전히 빠져 있는 상태인 독단적 믿음을 만든다. 독단적 믿음은 매혹적이고 우리 마음을 홀랑 빼앗아 가기 쉽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면도 있다. 반면, (여러 반론을 검토한 뒤 형성된) 신중한 입장은 미온적으로 느껴질 순 있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1800년대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오직 자유 토론을 통해 온갖 반박을 견뎌낸 믿음만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가 신뢰했던 고대 로마의 연설가 키게로는 항상 반대 주장을 자신의 주장만큼이나 깊이 연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게임에 불과한 토론이지만,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아니 오히려 토론이 게임이기에, 게임이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2-10 출력물로서의 신념의 이점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토론의 힘을 활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연하게도 직접 토론을 하는 것이다. 무작위로 입장을 부여받아 형식적 대결을 펼치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일터에서도 이런 방법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투자자 워런 버핏은 특정 주식의 매입 여부를 고민하면서 두 사람의 조언자를 고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한 사람은 매입에 찬성하고 다른 사람은 반대하는 토론을 벌여, 승자가 '패자가 받는 돈의 열 배'를 받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미국 내 정보기관도 이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2000년대 초 치명적 정보 실패를 겪은 정보기관은 기관 내 관점을 다양화하고자 외부 전문가들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대안적 관점이나 접근법을 검토하고, 불확실성이나 모호성,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판단에 대해 그 장단점을 주장해달라'고 의뢰했다.

부모님과 부딪쳤을 때 가장 놀랐던 순간은 두 분이 이런 말들을 썼을 때였다. 어머니는 "나는 네가 ⋯⋯라는 말로 대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혹은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처럼 자신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어색하게도 어머니의 본래 주장을 옹호하는 말을 하게 되었고, 우리 두 사람은 잠깐 입장이 뒤바뀌었다. 아버지는 "반대로 말해보자면⋯⋯" 또는 "그냥 한번 말해보자면⋯⋯"처럼 자신이 특정 견해를 고수하지는 않지만, 어떤 의견을 가정해 보고 싶다는 뜻을 알리면서 입을 열였다.

이런 표현들은 우리의 생각과 자아 사이에 틈(분리)을 만들어준다. 그 틈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수정해 나갈 수 있다. 그 틈은 놀이터나 마찬가지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필수적인 공간이다.  

저자가 부모님과 부딪쳤던 일과 비슷한 일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론 '분리'가 가져오는 이점을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11 사적 논쟁은 삶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사적인 관계에서 갈등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논쟁을 피하는 습관은 입을 꽉 다물고 살거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의견 충돌은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기껏해야 불연속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도 배웠다. 차이를 어느 정도 조율하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써야 했다.

아무리 격렬하다 한들 토론은 우리가 반대하는 사람에게 응답하는 다른 방법들, 이를테면 협상, 동맹 구축, 용서 같은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토론은 서로 간의 상호작용을 지속적이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과연 어떤 협상이나 동맹이 철저하고 비판적인 의견 교환 한번 없이 타결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토론이 그런 긍정적 역할을 하려면 때와 장소를 잘 가려야 한다. 이 점이 내가 사적 논쟁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이었다. 우리는 논쟁이 차츰 소멸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가끔은 완전히 포기하고 차이를 극복할 다른 방법을 찾을 줄도 알아야 한다.

사적 논쟁은 공식 토론에 비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전자는 삶이었고 후자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이 지닌 특징들은 우리가 진짜 도전(삶)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친구와 말다툼 이후 화해하고 나면, 그 친구와는 더 깊은 유대감이 느껴지곤 한다. 어째서일까? 언뜻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현상이다.

토론 속 출력물로서의 신념은 입론자들에 의해 이리 다져지고 저리 다져져 나온다.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다져져 나온 '신념'처럼, '화해ㆍ절교'도 (출력물로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게 아닐까.

그 친구와 싸워서 속이 상한 사실, 그 사실로 인해 절교하고 싶다는 마음. 반대로 좋았던 추억들, 그 추억들로 인해 화해하고 싶다는 마음. 이 둘 간의 줄다리기에서 마침내 '화해의 마음'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바라보는 그 친구의 가치는 한껏 높아진다. 역지사지로 친구 또한 그럴 테고 말이다.
 

#3 나의 생각

#3-1 무지의 베일

[시사경제용어사전] 무지의 베일

'입장 전환'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예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 나왔던 어떤 개념을 떠올렸다. 바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들어가는 순간 자신에 대한 기억만 잃는 공간'인 '무지의 베일'을 제안했다. 자신에 대한 기억만 제거되기에 다른 인지 기능에는 문제가 없다. 이 공간에서 '정의'를 논한다면 어떨까? 이 공간 속의 사람들은 사적인 이기주의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 결론적으로, 편향 없는 논의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2-6의 내용이 신념과 정체성의 분리라면, 무지의 베일의 내용은 정체성의 상실이다. 하지만 효과는 서로 같을 테다.

 

#3-2 이해의 기술

이해에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사실은 다른 이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방증한다. 한번 실험해 봤다. 지금 당장 내 기준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하 '그것')들을 떠올려봤다. 먼저 감정적 거부반응이 날 맞이한다. 그 압박감에 종이와 펜을 꺼내기도 싫어질 정도다. 그리고 #2-3에 있는 입장 전환의 기술을 적용한다. 이 시점에서 왜 종이와 펜을 꺼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머리로만 하기엔, 감정적 거부반응에 의해 '그것'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기 때문이다.
 
그렇게 종이에 이것저것 써 내려가고 첨삭도 하면, 그제야 '그것'이 조금씩 이해된다. 동시에 그 이해의 정도값만큼 감정적 거부반응이 실시간으로 사그라든다. 마치, 뜨거운 온천의 물 온도에 점차 익숙해지는 느낌 같다. 그런 점에서 '이해'라는 것은 '관성'과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이해'라는 이름의 고유한 '관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이해'는 마치 관성 법칙처럼 일관성을 유지하려 하고, 일관성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타인의 관성을 체험하려면 (나의 관성 - 타인의 관성)의 절댓값만큼에 해당하는 거부 반응을 이겨내야 한다.

 

#3-3 시한폭탄

예전에 친구와 말다툼으로 싸운 기억이 났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그날의 말다툼을 유발한 무언가(방아쇠)에 있지 않았다. 그 친구와 나의 평소 태도에 있었다. 약간의 틀어짐으로 생긴 갈등과 상처에 대해 둘 중 누구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내부적으로 곪아갔다. 그러다 어느 날, 나와 그 친구는 결국 그동안 침묵해 온 만큼의 강렬한 감정을 쏟아내며 다퉜다. 그 순간엔, 둘 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오랜 기간에 걸친 비겁한 침묵(#2-11)을 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지금까지도 쭉 친구 사이를 유지했을지도 모르겠다. 침묵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견 차이를 메꾸는 게 더 문제인 경우도 있다 ('취향 차이'처럼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 등등). 그러나 내버려두면 곪을 게 분명한 내용이라면, 용기를 내야 한다. 이미 상처가 있고 곪아가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침묵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처의 내일은 더 곪을 것이고 그만큼 용기를 내기 더 힘들어질 테니.

 

#4 요약

신념(입장)에는 관성이 있다. 이 관성에서 자유로워지면, 더 좋은 신념을 고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