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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터 - 교육

interfacer_han 2025. 2. 18. 20:11

#1 개요

토론자에겐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의견에도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추상적 관념이 아닌 생생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토론의 교육적 측면에 대해 다룬다.
 

#2 핵심 논리

#2-1 토론은 교육이자 스포츠다

내가 아는 건 토론이 강력한 교육의 도구라는 사실이었다. 내 경우엔 이 활동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배우는 법도 알려주었고, 나아가 배우고 싶다는 실질적인 욕구를 내 안에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가끔씩 사람들에게 이를 '정보 < 기술 < 동기'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정보
토론을 하려면 아이들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정보를, 주제 면에서(정치, 역사, 과학, 문화 등) 그리고 자료 출처 면에서(뉴스, 연구, 데이터, 이론 등) 접하고 그에 대해 실시간으로 논쟁할 수 있을 만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했다.

기술
하지만 진짜 학습은 그 내용을 뛰어넘어 이루어졌다. 토론은 종합적인 활동이다. 관련 기술(연구, 팀워크, 논리적 추론, 작문, 대중 연설)은 학생들이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동기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할동이 아이들에게 배움에 관심을 가질 동기가 되어주었다는 점일 터다. 교실에서의 공부는 하향식에 수동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토론은 지속적인 참여를 장려하고 가장 기본적인 충동, 즉 타인이 내 말을 듣게 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초한 스포츠다.

나도 대학에서 정보, 기술, 동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맨 마지막에 있는 '동기' 그러니까 '타인이 내 말을 듣게 하려는 욕망'이 구심점이 되어, 나를 '정보' 및 '기술'에 미친듯이 매달리게 만들었다. 단어 그대로 '스포츠'를 하는 느낌, 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2-2 스포츠: 지는 것에 대한 교육

(저자의 동료인) 파넬레는 내게 토론은 지는 것에 대한 교육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토론자라면 누구든지 대회에서 이기는 경험보다는 지는 경험을 더 많이 했다. 매주 청중 앞에서 자신의 주장이 허물어지는 걸 실제로 마주하는 경험을 했다. (...) 아픈 교훈을 아로새겨서, 실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우리의 결심과 동지애를 단단하게 다지게 한다는 점이었다. 실수한 기분에 반복해서 노출되는 경험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도 만들었다. 우리 토론자에겐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의견에도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추상적 관념이 아닌 생생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경쟁에 뛰어든 선수의 목표는 물론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상대를 무찌르겠다는 식의 임전 태세는 사실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장기적으로는 상대방의 선의와 게임을 계속할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공고한 규칙이 필수적이다. 토론은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정치ㆍ경제적 갈등과 사적인 싸움에서 잊기 쉬운 이 진실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토론이 특히 그렇겠지만, 사실 모든 스포츠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지속 가능한 토론 문화를 위해선, 지는 경험이 전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환경과 인식을 조성해야 한다.
 

#2-3 스포츠인가, 전쟁인가

하지만 토론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는 바로, 지나치게 대립적이라는 지적이다. 언어학자 데버라 태넌은 그가 '논쟁 문화'라 부른 것을 매도한 일로 유명하다. 이 논쟁 문화가 대화보단 토론을 중시함으로써, 사회를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는 분위기'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 문화는 경쟁적 쟁투 또는 "진짜 전쟁이 아닌 맥락에서도 마치 전쟁에 임한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썼다.

내겐 이 마지막 말이 무엇보다 정확한 지적처럼 보였다. 토론자로서 그리고 토론 코치로서도 나는 분명 중요한 라운드를 치르기 전 사기를 북돋고자 전투 언어("으스러뜨려버려"나 "저쪽 논증을 완전히 발라버려")를 전용한 죄가 있었다. 그럴 땐 나도 내가 경멸해 마지않은 선동적 정치가나 케이블 채널 진행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승부욕과 강박은 분명히 다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생각에 매몰되면, 토론은 더 이상 스포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2-4 토론이 전쟁일 수 없는 이유

(토론 대회에 코치로서 참여한 저자가 맡은 팀이 패배하고) 나는 호텔방으로 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대회 참가자로 겪은 어떤 고통보다도 심한 고통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내가 잠에서 깼을 땐 해가 지고 난 뒤였다. 나는 준준결승전 때 입었던 셔츠를 도로 입었다가 아이들이 남긴 "수영하러 가요"라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다시 벗어 방바닥에 던졌다. 호텔 수영장에 가보니 그날 오후에 겨룬 남아프리카공화국 아이들 몇 명을 포함해 여럿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나는 우리 팀원 하나를 붙들고 몰아붙였다. "속이 쓰리지 않아? 정말로?" 그러나 아이가 대답했다. "아슬아슬하게 진 것도 아닌데요, 뭐."

나는 이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토론의 또다른 측면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토론을 통해 적수를 패배시킬 순 있을지언정 절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패배자들은 분명 며칠 혹은 몇 주 뒤에 다시 돌아와 다른 반대를 이어갈 것이다.

좋은 토론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완전히 이기는' 결과는 드물었다. 양측의 신념이 아주 약간 조정되는 경우가 훨씬 흔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사상들이 반드시 과거의 이항 대립을 고수하며, 이를테면 덜 통합주의적이고 더 민족주의적이 되는 식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새로운 사상은 두 사상의 종합이었다. 둘 다이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전쟁은 씻을 수 없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손해를 입히지만, 토론은 그렇지 않다. 수영장에 간 아이들은 토론이 전쟁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테다.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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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투agonism는 그리스어 단어 '아곤agon'에서 온 것인데, 아곤은 투쟁과 충돌을 뜻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올림픽에서처럼) 운동선수끼리의 대결을 일걷는 말이다. 이 말은 토론을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이다. 이처럼 토론을 전쟁이 아니라 반복적인 대결 또는 게임으로 본다면, 결국 패배는 불가피하고 승리는 영구적이지 않다. 그러니 승리와 패배 모두에 가급적 품위 있게 대처하는 게 지혜로운 행동일 테다.

 

#2-5 토론의 사회적 이익

2006년 조직행동학 교수 크리스티나 팅 퐁은 양가감정(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과 창의성(개념들 간의 특이한 상관관계를 인지하는 능력)의 연관성을 제시했다. 그는 두 실험 결과를 논하면서 양가감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특이한 환경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그런 특이한 결합에 대한 민감성을 높인다"라고 주장했다. 그 결론은 비록 관리자가 일터에서 양가감정을 적극적으로 부추겨야 할 이유는 딱히 없더라도 "복합적인 감정의 잠재적 결과에 대해 더 균형잡힌 시각"을 취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토론과 지적 양가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의 관점이 진정한 반대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는 더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선택지만 있는 게 아니라, 한번 더 생각해서 제 3의 길을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교육 도구로서 토론이 지닌 또다른 측면이다.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지속해나갈 수만 있다면, 토론은 우리에게 꾸준히 서로에게 배워나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한국 사회는 전체주의 늪에 빠져 있다. 토론 문화가 한국에 널리 퍼지고 정착되길 고대하는 이유다.
 

#3 나의 생각

#3-1 교육 수단으로서의 토론 경험

좋은 토론은 논리정연한 말솜씨와 든든한 자료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자유토론 때 어떤 의제에 대해 혼자서 다른 의견이라는 이유로 발언하지 않고 넘긴 것, 찬반토론 때 내 주장을 강화해줄 논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통계를 토론에서 다 끄집어내지 않고 토론할 때의 내 책상 위에 가만히 두었던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준비했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꼭 달성하고 나가자는 마음이 생겼다. 또 토론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토론 주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명확하게 써서 기억해두지 않으면 기억은 내가 토론하기 생각하기 편한 쪽으로 왜곡되어서 방향이 잘못된 토론 준비를 해가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토론을 하는 이유는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는 토론을 할 때 반드시 상대를 꺽어버리고 내가 선택한 의견은 궁극적으로 반드시 옳거나 혹은 옳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토론을 준비했고 토론했었다. 방향 전환의 여지를 준비 과정에서부터 없애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토론 수업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던 적이 없었다. 나의 의견이 완벽할 것이라는 환상에 집착하고 그것이 깨질까봐 염려한 탓이다. 반대로 토론 수업이 끝나고 나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던 적이 없었다. 뒷통수를 때리는 듯한 상대편의 날카로운 주장에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환상이 벗겨지고, 지금 당장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며 직접 부딪히는 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 진행된 나의 성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토론에서의 쾌감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맥락으로 학문적 쾌감에 연결된다.

인생의 첫 번째 토론 수업은 나에게 많은 의견 교환에 대한 교훈과 고등학교에서의 수동적인 정보 주입이 아닌 능동적인 정보 소화와 비판하는 것의 영감을 주었다. 앞으로도 나는 많은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향하고 싶지 않다. 절대적으로 옳은 의견은 적어도 현실에는 없으니까, 완벽함이라는 환상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가 발전하는 대화의 장으로 가서 열심히 준비한 자신을 털어놓고 싶다.

2017년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토론 수업을 듣고 과제로 제출했었던 실제 내용이다. 그래서 수업(교육)의 형식이 '토론'이라는 것이 어떤 무게감을 지니는지 잘 알고 있다. 정말 재밌고, 정말 스트레스받으며, 끝나고 나면 정말 후련하다. 토론을 스포츠에 빗댄 저자의 비유는 정확하다. 이 레포트를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이거 디베이터 감상문 아니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비슷하다. 토론자들은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나 보다. 나 같은 초보가 토론 대회 세계 챔피언인 서보현(저자)과 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다.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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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난 이 수업을 토론이라고 생각하며 신청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책 한 권을 정해서 읽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정도로만 알고 신청했을 것이다. 그래서 첫 수업 후 (토론을 해야 한다는 무게감에) 약간 후회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수업은 나를 크게 성장하게 만든 수업 중 하나였다.

 

#3-2 교육 측면에서의 가성비

토론 형식의 교육은 별도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데도, 지식 및 지혜의 전수에 탁월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가성비가 좋은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토론을 통한 교육'을, 뜬구름 잡는 소리 혹은 이상주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토론은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교육 방법이므로.
 
물론, 토론이 지속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교육이 되고 말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모멸감이 없는 환경이다. 토론 준비, 토론 과정 그리고 토론 결과에 따른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그 어느 순간에서도 학생들은 모멸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애초에 그게 당연하다. 축구나 농구 한 게임 졌다고 모멸감을 느끼는 학생이 있는가? 좋은 교육가는 토론을 축구나 농구의 위상으로 올려놓는 교육가다.
 

#4 요약

토론은 스포츠고, 스포츠는 좋은 교육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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